지난달 18일 오후 서울 반포동 신세계백화점 지하1층 식품 매장. 농산물을 고르는 주부들의 시선이 예전과 달랐다. 주부 김수희(25·서울 성동구)씨는 쌀알 대신 상표를 보며 쌀을 고르고 있었다. 김씨는 “눈으로는 쌀 의 품질을 정확하게 구별하기 힘들어 브랜드가 알려진 쌀을 선택하게 된다”고 말했다.
메뚜기쌀·반디청결미·임금님표 이천쌀·안동사과·팔당 유기농산물…. 고급 농산물이 많다는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에선 농산물의 80% 이상이 ‘브랜드’ 제품들이다. 주부들도 농산물의 품질과 가격 등을 확인하기에 앞 서 브랜드에 먼저 시선을 던진다.
농산물에도 브랜드 시대가 열렸다. 농림부가 지방자치단체를 통해 농산물의 브랜드 사용 현황을 조사한 결 과, 99년 3215개이던 농산물 브랜드는 2000년말 4701개로 60% 이상 늘었다. 이 가운데 여러 출하 조직이 공 동으로 사용하는 공동 브랜드는 619개(13.2%)였으며, 특허청에 등록된 브랜드는 1243개(26.4%)로 집계됐다.
농림부 최희종 유통정책과장은 “일반미와 정부미로만 구분되던 쌀과, 생산지를 알 수 없는 채소와 과일이 식탁을 점령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말했다.
경남 산청군 차황면의 김경규(金慶圭·48)씨는 12년전부터 ‘메뚜기쌀’이란 브랜드 쌀을 시판하고 있다. 브랜 드 개념이 전무(全無)하던 12년 전엔 김씨 혼자 메뚜기쌀을 생산했지만 브랜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하나둘 씩 동참, 지금은 차황면 전체 농가의 70~80%에 달하는 350여 농가가 브랜드를 쓰고 있다.
김씨는 “농산물 브랜드가 성공하려면 고품질을 유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브랜드를 알리기 위한 마케팅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여러 품종을 실험 재배한 끝에 지역 조건에 가장 알맞은 벼 품종을 골라 농약을 쓰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또 같은 브랜드를 쓰는 농가들이 고품질 쌀 생산에만 전념하도록 풍·흉년 에 관계없이 일정 소득을 보장해줬다.
김씨는 “수확량이 모든 소득을 결정한다면 누가 고품질을 유지하는 데 신경을 쓰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96년 42세의 나이로 경상대 농업학과에 진학, 고품질 쌀을 생산하기 위한 배경 지식을 공부하기도 했다.
메뚜기쌀은 방학 기간 도시 어린이들의 농촌체험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등 마케팅에도 꾸준한 노력을 기울 인다. 김씨는 12년전부터 벼 수확기 부산·창원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해온 현장 견학을 올해는 수도권 지 역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전남 나주의 세지농협은 96년부터 ‘세지 머스크 메론’이란 브랜드 메론을 내놓고 있다. 5㎏ 박스의 도매 가 격은 7000~8000원선으로 보통 제품들에 비해 20%쯤 비싸다. 하지만 시장 점유율은 50~70%에 달해 국내 메 론 시장을 휩쓸고 있다.
세지농협은 열대과일인 메론을 사계절 선보이기 위해 비닐하우스에 난방시설을 도입, 겨울에도 안정적으 로 메론을 출하한다. 소비자들은 사시사철 ‘세지 메론’을 맛보게 되자 브랜드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이곳 농민 들은 시세 안정과 브랜드 품질 유지를 위해 생산량 및 출하시기를 조절하고 있다. 공급 과잉으로 인한 시세하 락을 막기 위해 하우스 단위로 파종일을 안배한다. 최고의 품질을 지키기 위해 수정일부터 출하일까지 최적 기간을 컴퓨터로 계산해 재배한다. 세지농협 박동학(朴鐘學·60) 조합장은 “농민들은 세지 메론을 알리기 위 해 매년 대도시 쇼핑센터를 직접 찾아 시식회를 벌이는 등 마케팅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98년 43억원이던 매출액은 지난해 85억원으로 3년 만에 2배가 증가했으며, 메론 농가도 96년 43가구에서 지난해 125가구로 늘었다.
농산물 종류는 다르지만 같은 브랜드를 사용하는 경우도 생겼다. ‘5℃ 이온쌀’로 유명한 부산의 풍년농산 이 10월 출시할 ‘러브미(米)’란 쌀 브랜드를, 충남 논산의 민속주(酒)업체인 ‘가야국 왕주’가 곡주(穀酒) 브랜 드로 사용할 예정이다. 가야국 왕주의 이준연(31) 실장은 “품질이 보증되는 러브미 쌀로 빚은 술에 러브미란 이름을 붙인 것은 앞으로 러브미를 쌀로 만든 음식의 대명사로 키우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말했다.
풍년농산과 가야국 왕주는 러브미의 상표 디자인을 서울올림픽 때 마스코트 ‘호돌이’를 디자인한 김현(52) 씨에게 맡기는 등 브랜드 성공을 위해 미세한 곳까지 신경을 썼다. 경기도 안성의 ‘안성마춤’도 지역에서 쌀· 사과·배·한우 등을 생산하는 농가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동브랜드다. 특히 한우는 국내 최초로 생산자 리콜제 를 실시, 브랜드의 성가(聲價)를 높이고 있다.
일부 브랜드들은 품질의 차별성을 강조하기보다 지역 이름을 붙이는 데 급급하다는 지적도 있다. 삼성경 제연구소 민승규(閔勝奎·42) 박사는 “쌀의 경우 재배·도정·저장 방법 등이 품질의 50% 이상을 결정하지만, 우 리나라의 700여개 쌀 브랜드 대부분은 지역 이름을 붙이는 데 그친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보르도 포도주처 럼 지역 명칭이 세계적 브랜드로 성장한 예도 있지만, 브랜드 자체가 상품의 특징을 설명하거나 소비자의 감 성에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추먹고 맴맴’ ‘첫눈에 반한 딸기’ ‘빨간 여인(사과)’처럼 감각적인 이름으로 소비자의 관심을 끄는 브랜 드도 등장했다. 민 박사는 “매년 수많은 브랜드가 탄생하지만 소비자에게 기억되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라며 “우리 농민들도 단순한 브랜드 개발보다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2002/10/04 조선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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